서울 정릉 봉국사 앞 내부순환로는 쉴 새 없이 오가는 차들로 붐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시간표를 좇아 사람들은 헐떡거리는 숨을 뒤로
하고 도로 위를 뛰고 또 달린다. 그런데 도로에서 ‘한 생각’만 돌리면 마주하게 되는 서울 정릉 봉국사는 전혀 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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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국사
일주문. |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니 고요함만 가득하다. 천왕문(天王門)에는
‘신광불매만고휘유 입차문내막존지해(神光不昧萬古輝猷 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쓴 주련이 걸려있다. ‘(부처님의) 신비스러운 빛은 어둡지 않아서
오랫동안 빛나도다. 이 문안에 들어 올 때는 알음알이를 두지 마라.’ 어줍지 않은 지식은 집어치우고 자기를 바로 보라는 부처님의
채찍질이다.
십수 년째 봉국사에서 주석하고 있는 월서 스님은 도심사찰 한 가운데서 세상사를 살핀다.
“1998년 종단 분규 당시 호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때 업무가 너무 많아 서울에 거처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때마침 봉국사를
추천해주는 사람들이 많아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염화실(拈花室)에서 만난 월서 스님은 호탕한 웃음만큼이나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수행이야기와 은사 금오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죽음의 현장에서 자유의 길로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지리산 공비토벌에 참가했습니다. 7~8개월 정도의 시간을 유격대에서 보냈습니다. 무수히 많은 전투를 치렀습니다.
유격대는 30명으로 구성됐는데, 일주일 지나면 몇 명씩 숫자가 줄어들 정도로 엄청난 격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전투 도중 인민군에 생포되었다가
간신히 도주해서 살아났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참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요.”
스님이 제대를 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1955년 겨울, 남원 실상사 신도인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다. 그때 실상사 약수암에서 은사인 금오
스님을 만났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당당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스님은 그 자리에서 금오 스님에게 전부터 가지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금오 스님은 길지 않게 답했다.
“생사(生死)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대사(一大事)다. 우주의 섭리로 보면 극히 일부분이지만 이것을 뛰어넘어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스님이 되어 진정한 자유를 찾아보도록 해라.”
월서 스님은 몇 달 후 금오 스님이 화엄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스님을 찾아 길을 나섰다. 당시 금오 스님은 서울 봉은사, 보은 법주사,
남원 실상사를 정화(淨化)한 뒤 화엄사로 와 있던 참이었다. 월서 스님이 화엄사에 갔을 때는 사형(師兄)인 탄성 스님과 월주 스님 등이 금오
스님을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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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서스님의 화엄사 구층암으로 입산할 때의
모습(뒷줄 오른쪽) 1956년 4월 찍은 사진이다. | “탄성 스님이
머리를 깎아줘 바로 행자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화엄사에는 50여 대중이 함께 살았는데 많은 숫자가 함께 살기에는 절이 너무 가난했습니다. 매일
감자만 먹다보니, 감자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지요. 하하. 은사스님은 대중들이 한시라도 그냥 노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참선을
하든지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또 일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탁발을 나갔습니다. 며칠씩 걸려 진주까지 다녀온 적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발심(發心)이 안 돼 탁발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화엄사에서 인간으로서 더 경험할 수 없는 그런 밑바닥의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어려운 상황을 극복했던 힘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습니다.”
월서 스님은 화엄사에서 1년여 동안 행자생활을 했다. 공양주(供養主) 3개월, 채공(菜供) 3개월에 별좌(別座)까지 두루 거쳤다. 출가이후
행자기간은 “중이 되기 위한 담금질의 연속”이었다고 월서 스님은 회고했다.
“은사스님께서는 경(經)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해인사와 통도사 등을 제외하고는 강원(講院)이 거의 없었지만 저는 강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컸습니다. 솔직히 사찰 생활이 너무 힘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새벽 도량석(道場釋)을 마치고 절을 빠져 나가려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은사스님이 일주문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두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계속 붙잡혀서 절에 할 수 없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하.”
마음을 다잡은 월서 스님은 지근거리에서 금오 스님을 모시기 시작했다.
어렵게 이뤄낸 정화,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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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스님
진영사진. | 금오 스님은 당시 ‘지리산 호랑이’로 불릴 정도로 엄했다고 한다. 또
한국불교를 정화해 수행하는 스님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
“스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눈 밝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고 하셨어요. 경허, 만공, 보월 스님의 가풍을 잇고 있는 은사스님의 지론은
한마디로 ‘무조건 참선’이었습니다. 공부는 참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은사스님은 또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신근(信根)이 서 있는 사람이라야 쉽게 성불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령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으면 반드시 굶주림을 면한다고 믿는 것처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노끈으로라도 나무를 끊을 수 있다는 믿음이며, 방울물로 돌을 뚫을 수 있다는 믿음이며, 표주박으로도 큰 바닷물을
퍼낼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굳은 신념이 철두철미한 사람이라야 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스님은 믿음은 도의 근원에
들어가는 공덕의 모체가 되어 변함없는 모든 착함을 길러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오 스님은 참선과 함께 철저한 계행(戒行)과 하심(下心)을 강조했다. “하심은 성불의 길을 넓히고 끝없는 도심(道心)을 발양(發揚)하는
토양이며 첩경”이라는 것이다. 금오 스님은 하심을 하기위해 거지생활을 자청했다고도 한다. 어느 날 거지 소굴로 찾아간 금오 스님은 △밥은 어떤
밥이든 트집을 잡지 않는다 △옷은 헤어져 살갗이 나와도 탓하지 않는다 △잠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지 잔다는 3개항을 준수할 것을 약속,
거지패들과 어울려 같이 생활하며 하심을 통한 보임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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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열린 유교법회 모습. 원안이
금오스님. | 참선 수행과 계행을 강조했던 금오 스님은 잘 알려져 있듯이 정화에도
적극 나섰다.
“한국불교에 조계종을 있게 한 스님이 바로 금오 스님입니다. 스님은 16살에 출가했습니다. 스님은 출가할 때부터 지계(持戒)에 철저하셨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만공 스님과 함께 창씨개명도 거부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서울 대각사에서 용성 스님을 3년 여 간 모시기도 했는데,
제가 볼 때 금오 스님은 용성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생전에 제자들에게 용성 스님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특히 용성 스님의
건백서를 보고 정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절감하신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스님은 효봉 스님, 동산 스님, 청담 스님 등과 함께 정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당시에는 대처승이 7,000명이었고 비구승은 300명에 불과했어요. 숫자는 적었지만 금오 스님께서는 반드시 정화불사가
성공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고 그만큼 열심히 활동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금오 스님이 대처승들과의 언쟁에서 한 번도 진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금오 스님이 워낙 깨끗하게 수행해 오셔서 대처승들도 어찌 하지를 못했습니다.”
금오 스님은 생전 제자와 후학들에게 “중을 하려면 용성 스님처럼 하라.”고 여러 번 얘기했다고 한다. 용성 스님의 수행과 계행, 포교 의지
등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다.
용성 스님은 1926년 5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에 ‘승려가 아내를 얻고 고기를 먹는 행위를 반대한다’는 건백서(建白書)를
냈었다. 그렇지만 총독부는 일본승려 대부분이 취처(娶妻)와 육식(肉食)을 했기 때문에 용성 스님의 건의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것을 지켜본 금오
스님은 일제불교와 대처불교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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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성철스님과
함께. |
월서 스님은 금오 스님을 도와 정화에도 적극 참여했다. 정화가 한창 진행될 때는 수백 명이 한자리에서 육탄전을 할 때도 많았다고
한다.
“정화를 거친 후 한국불교는 질적, 양적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특히 매 안거 때마다 100개가 넘는 선원에서 2200명 이상이
정진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일부스님들이 계율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는 등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혔다고 생각합니다. 정화 당시에는 스님들이 승가교육 정상화와 불교방송, 불교병원 설립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했고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오늘날 일정부분 이것들이 가능해졌습니다. 1994년 개혁이후 불교의 위상은 많이 올라갔습니다. 그런 만큼
앞으로는 더 잘해야 합니다. 스님들은 청정해야 하고, 계율을 철저히 지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스님은 “요즘 일부 원로의원을 비롯한 각급 소임자들이 적절치 못한 언행(言行)으로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구설에 휘말리고 있다. 선배
어른스님들이 이룩하려한 ‘정화 이념’이 흐지부지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정화의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종단
현안에 원로의원들이 개입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결코 적절한 것이 아니다.”며 선을 긋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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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대구 보현사에서 보살계 수계법회 후
금오 이두 월서 월탄 스님 등이 보인다. |
60년간 뛰어온 마라톤 회향 준비
월서 스님은 출가 이후 정화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될 때마다 화두(話頭)를 참구하기도 했다. 스님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은사스님께 받은 ‘이뭣고’를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제가 참선하고 있으면 ‘월서야 들고 있느냐? 놓치고
있느냐? 놓치면 죽은 사람이다’고 경책해 주셨습니다. ‘이뭣고’를 들고 한참 동안 정진을 하다가 성철 스님께 ‘마삼근’을 받아 그것을 들고
있습니다.”
1990년 스님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내려놓고 해인사 선원으로 가 하안거 방부를 들였다. 월서 스님은 평소 성철 스님 회상에서 꼭 한 철을
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해인사로 향했다. 월서 스님은 화두를 받기 위해 성철
스님이 있는 퇴설당으로 찾아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성철 스님은 “월서라고 예외는 아니지.”라고 했다. 당시 성철 스님에게 화두를 받으려면
3000배를 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3000배를 하고 오라는 뜻이었다.
“안거를 보내며 3000배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화두 안 받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에 때려치울까 하다가, 며칠이
걸리더라도 꼭 하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월서 스님은 점심공양 시간을 쪼개 장경각에서 하루 1000배씩 절을 했다. 찜통더위 속에
셋째 날 3000배를 모두 마치자 가사 장삼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스님은 당당하게 다시 퇴설당을 찾았다. 성철 스님은 여기서 월서 스님에게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주었다.
“깨달음은 확철대오(廓徹大悟)와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열심히 하면 점차적으로 자신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동이 트면 해가 떠서 점점
밝아지듯이 깨달음의 문도 조금씩 열어 갈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바로 얻을 수 없어도 계속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무엇인가 맑아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공부에 대한 이해가 되고 많이 진전된 경험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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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글씨를 쓰고 있는
월서스님. |
월서 스님은 또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호계원장, 교구본사 주지 등 다양한 소임을 맡았었다. 현재는 조계종 원로의원이기도 하다. 월서 스님이
생각하는 소임자의 자세는 무엇일까?
“공직에는 공심(公心)을 가지고 임해야 합니다. 이권이나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채우면 본인뿐만 아니라 종단 전체가
불행해집니다. 원로회의나 중앙종회, 총무원을 비롯한 중앙종무기관과 본말사 모든 곳에서 필요한 것이 공심입니다. 정부 공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리를 저지른 공무원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불행하게 합니다.”
스님은 가끔 불거지는 승단 내부 문제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승단의 화합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결코 세속법에 의지해서는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범망경』 보살계에도 ‘비법입제계(非法立制戒)’가 있습니다. 승단의 일을 계율이 아닌 비법(非法), 즉 국법에 예속시켜 통제하려고 하거나 심판을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율로 정해져 있는데도 승단의 일을 세속으로 끌고 나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승단의 일은 계율정신에
의해 승단 안에서 처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승단의 청정성과 화합을 지켜나가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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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서스님. | 스님은 최근 설립한 천호문화재단을 통해 동남아 어린이들의 교육지원에도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1만 5000권의 교과서를 비롯한 교육 자료 등을 전달했다. “캄보디아 승왕인 텝봉 스님의 초청으로 현지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산간 오지와 빈민촌을 둘러보면서 해맑은 아이들이 교과서도 없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어요. 불교계 안팎의
NGO들이 캄보디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경제적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캄보디아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난해부터 주변 대중들과 마음을 모아 현지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월서 스님은 몇 년 전 북녘 동포와 외국인노동자를 돕기 위한 첫 서예전을 열어 자비 보시행을 실천했으며, 또 성북구에도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매년 보내고 있기도 하다.
“부처님 은혜로 출가해 60여년을 잘 살아왔습니다. 마라톤으로 치면 완주는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미력이나마 제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으로 이번 생을 회향하고 싶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국내외 어려운 대중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계속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을 직접 겪고 출가해 정화에 참여하고 현대 불교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월서 스님의 수행여정은 드라마틱했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회향을
통한 ‘해피엔딩’에 더 관심이 많은 듯 했다. 자리를 정리하며 마지막 질문을 내놓았다.
“다음 생에도 인연이 돼 금오 스님을 만난다면 다시 모실 수 있습니까? “당연합니다. 아마 다음 생에서도 은사스님께서 저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1만에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마라톤을 뛰었습니다. 기를 쓰고 완주했어요. 그런데
‘확철대오(廓撤大悟)’라는 신기록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다음 생에는 금오 스님을 다시 만나 동진출가해 반드시 신기록을 세울 것입니다.
하하.”
금오 스님은 |
불교정화에 앞장섰던 금오(金烏) 스님은 한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선지식 중 한명이다. 1896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금오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도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금오 스님은 원래 만공 스님의 제자였던 보월 스님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아 그의 법제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보월 스님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입적하는 바람에 전법을 받지 못했다. 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전한 스님은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만공 스님이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할아버지가 손자를 거둔 격이다. 만공스님의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德崇山脈下 今付無文印
寶月下桂樹 金烏徹天飛(덕숭산맥하 금부무문인 보월하계수 금오철천비). 덕숭산맥 아래 지금 무문인(無文印)을 부치노니 보배 달 비록 계수에서 졌으나
금까마귀 하늘에 사무쳐 날으네.” 이때 만공 스님에게 ‘금오’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법주사 조실로서 후학을 제접하다 1968년
열반에 들었다. 금오 스님의 제자로는 불국사 조실을 역임했던 월산 스님과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월주 스님, 현 조계종 원로의원인 월서, 월탄
스님 등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