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상흔(傷痕)이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남원 실상사 약수암에서 처음 뵌 스님의 말씀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고 죽는 것보다 큰 사건도 없지만 우주의 섭리에서 보면 이 또한 풀잎 위 이슬처럼 허망한 것, 마땅히 대장부라면 수미산처럼 높은 깨달음을 얻어 생사해탈에 이르러야 한다. 번뇌의 망상에서 벗어나 대자유를 얻으려면 절에 들어와 수행할 생각은 없는가?’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사문이 되겠다는 뜻을 말씀드리자 ‘선악미추(善惡美醜)의 기준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모든 것은 오직 마음 하나에서 만들어진다’며 수행정진에 몰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지난 2012년 금오스님 다례재에서 월서스님이 올린 분향문 중 일부다. 제자들에게 참선을 강조하고 수행에서나 생활에서나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던 스승은 몹시 어렵고 힘든 분이었지만 그렇게 엄하게 배운 덕분에 수행자로서 한 치 티끌 없이 살아왔다. 제자는 입적할 당시 스승보다 훨씬 많은 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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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서스님은 스승 금오선사와 사형 월산스님을 이어 법주사 조실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참선을 강조했던 스승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종단과 한국불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 남은 유일한 원력이라고 강조했다. |
마지막 남은 일은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더 알려 종단이 제대로 서고 한국불교가 국민들의 기쁨과 희망이 되는데 일조하는 일이다. 금오스님 제자들은 법주사 불국사 금산사 등에서 법을 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법주사가 단연 중심 도량이다. 월서스님은 스승과 맏사형을 이어 법주사 조실(祖室)로 추대 받아 선법을 펴고 있다.
월서스님은 1956년 가을 구례 화엄사에서 금오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화엄사에는 원담, 월주, 탄성스님이 있었다. 화엄사 본사를 맡고 행자를 받아들인 것은 금오스님도 이 때가 처음이었다. 월서스님은 60여 년 전 함께 출가했던 행자동기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월서스님이 나이가 가장 많았다. 월초 월영 월만 월곡 월국 월석스님이 함께 출가한 행자도반이다.
몇 명은 고인이 되었으며 대부분 환속했다. 월서스님도 몇 번 환속할뻔 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절에 가끔 찾아오는 여신도가 월서스님이 출타한 사이 스님의 방에서 잠을 자는 사건이 발생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 잠자리를 내주었는데 그 일이 사단이 되어 은사 스님에게 불려갔다. 대중공사가 벌어져 월서스님은 참회로 벌을 받았다.
큰스님의 가풍에 따라 ‘지리산 참회’와 ‘금강산 참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지리산 참회는 3000배의 가벼운 벌이었고 금강산 참회는 모든 수좌가 몽둥이로 엉덩이를 치는 무거운 벌이었다. 당시 절에는 100명이 넘는 수좌가 있었으니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월서스님과 다른 한 명의 스님이 그날의 대중공사 참회자였다. 그 스님은 대중공사를 하자마자 승복을 벗고 하산했다.
“언행이 한 치 빈틈없이 일치
무서울 정도로 철저한 분
법에 관련된 말 이외
세속 일, 농담 일체 없었다”
월서스님은 대중공사에서 여신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해라고 강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오스님은 ‘애초 승려의 마음가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며 더 호통쳤다. 금강산 참회를 받고 일주일 동안 꼼짝없이 엎드려 있어야했다.
금오스님은 계율을 파하거나 그에 상당한 잘못을 하면 엄한 벌을 내렸다. 금오스님은 몽둥이도 모자라 1개월간 대중공양 명을 내렸지만 월서스님은 묵묵히 해냈다. 다른 도반들이 정말 대단하다며 칭찬 할 정도였다.
몹시 억울한 일이었고 견디기 어려웠으면 벌써 하산했겠지만 끝내 참아낸 월서스님은 모든 벌을 감내하고 새롭게 정진에 들어갔다. 스님은 칼로 손가락을 베어 ‘영리여자원(永離女子願)’을 써서 목에 걸고 정진했다. ‘여자는 죽을 때 까지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평생을 지켰다.
참선만 강조했던 스승은 한 번 정해지고 옳다고 여기면 어떤 타협이나 예외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상처받고 속상했던 적도 많았다. 다른 상좌, 다른 문중의 스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선수행, 계행, 법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면이 없던 스승이었다. 그 자신감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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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 시절의 금오스님과 제자들. 금오스님 뒤편이 월서스님. |
인민군에게 끌려가다 기지를 발휘해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맞딱 들인 뒤 대자유를 얻기 위해 출가했던 ‘대장부’였지만 젊은 날 월서스님은 수많은 경계에 흔들리고 갈등하는 ‘청춘’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요, 바위를 향해 맹렬이 돌진하는 파도와 같이 거칠 것 없는 청춘에게 스승은 언제나 ‘할’과 ‘방’으로 누르고 조였으니 지켜보는 사람은 늘 조마조마 할 수밖에 없었다.
금오스님은 토굴에서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월서 월초 두 상좌는 누룽지 쌀 그릇 등이 가득 든 쌀가마니를 등에 지고 험난한 지리산을 5일간 찾아 헤맸다. 지리산에서 나고 자라 지리산 구석구석 안 가 본 곳이 없지만 무거운 쌀 짐을 지고 산을 오르내리기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자루에 쌀이 가득했지만 금오스님은 절대 못 꺼내게 하고 산나물 물로 허기를 채우도록 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물과 나물로 배를 채우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며칠 씩 산을 오르내렸으니 등에 진 쌀을 못 먹게 한 은사 스님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인내심 많은 월서스님도 끝내 추위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지리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등에 진 짐을 던져버리고 은사 스님에게 “스님, 그까짓 성불 전 안할랍니다” 인사하고는 눈물을 훔치며 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서 “월서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 뒤돌아보니 은사 스님이 뒤쫓아 내려오고 있었다. 은사 스님은 “이놈아, 고작 그것도 못 이기고 중노릇을 하려고 했더냐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토굴 찾는 것은 그만 두고 천왕봉을 돌아서 쌍계사나 가자”며 우는 상좌를 달랬다.
월서스님도 다정하게 감싸는 은사 스님을 따라 다시 걸망을 짊어졌다. 힘이 센데다 행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월서스님은 늘 대장이었다. 금오스님은 그 기를 꺾어놓으려 했다. 다른 행자들을 시켜 혼을 내도록 하고는 금오스님은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았다.
하지만 행자들이 오히려 월서스님에게 밀리자 그 제서야 다가와 제자를 감싸 안았다. 이 모두 제자를 강하게 키우려는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자신을 누르고 인내해야하는 수좌에게 넘치는 힘은 장애였다. 짐을 지고 토굴을 찾게 한 고행이나 물리력으로 제압하려 했던 것은 인내심을 길러주기 위함이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월서스님은 “중노릇 제대로 하려면 집착과 애착을 끊어야한다. 바른 수행을 하면 설령 애욕과 집착이 찾아오더라도 썩은 새끼줄과 같아 쉽게 끊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참선수행해야한다”며 “늘 참선을 강조하셨으며 당신도 틈만 나면 참선을 하셨다”고 말했다.
몸소 보여주었던 스승의 계행(戒行)은 그대로 제자의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
“큰스님께서는 법문을 빠지지 않고 해주셨는데 아주 힘차면서 경전의 말씀과 큰스님의 계행이 그대로 딱 맞아 떨어져 듣는 우리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기에 충분했다. 환갑잔치를 준비하는데 절에서 무슨 환갑이냐며 가버리시고 단 한 번도 법(法)아닌 말씀은 하신 적이 없다. 우리 같으면 농(弄)도 하고 세속일도 꺼내고 우스갯소리도 할 텐데 큰스님은 법에 관련한 이야기가 아니면 단 한마디도 꺼낸 적이 없다. 그만큼 아주 사소한 것도 그냥 넘기지 않고 지키셨다. 일제가 그토록 강요하는데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정도로 강직한 분이셨다. 만약, 제자들에게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당신이 지키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지금까지 스승을 그리워하고 가르침을 지키겠는가. 말과 행동이 그대로 일치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존경하고 제자들이 나이가 들수록 큰스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분의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려는 것도 이처럼 위대하고 큰 스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고 스님들은 그 행을 배우고 신도들은 자부심을 갖기를 원해서다.”
금오스님의 맏상좌이자 대선사로 추앙받는 월산스님이 1974년 금오스님의 생전 법문과 게송 등을 모아 <금오집>을 발간할 때 경봉스님이 찬(讚)을 썼었다.
‘덕숭산맥하(德崇山脈下) 금부무문인(今付無文印) 보월하계수(寶月下桂樹) 금오철천비(金烏徹天飛)’ ‘덕숭산맥 아래 지금에 무문인을 부치노니 보배달 비록 계수에서 졌으나 금 까마귀 하늘에 사무쳐 날으네’ 덕숭의 맥을 이은 금오스님의 법이 월자(月字) 돌림의 상좌들에게 이어져 널리 퍼졌다는 뜻으로 읽힌다. 아마 찬(讚)을 받으러 갔던 월산스님을 염두에 둔 글일 것이다. 이제 사형 월산스님을 이어 월서스님이 그 법을 잇고 있다. 그래서 스님은 단호한 말로 원력을 되새겼다. “법주사 조실로서 금오스님 가풍을 이어가는 그 생각 밖에 없다.”
■ 월서스님은…
1956년 구례 화엄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토굴 선원 등에서 화두 정진했다. 조계사 불국사 주지, 중앙종회의장, 호계원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원로의원과 법주사 조실로 스승의 뜻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금오선수행연구원을 설립해 스승의 뜻을 기리는 한편, 천호월서희망재단을 통해 국제구호 활동 등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다.
※ 법주사ㆍ금오선수행연구원 이사장 월서스님·불교신문 공동기획
[불교신문3058호/2014년11월15일자]